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단 편집) === [[동로마군|로마군]]의 상황과 배치 === 그에 반해 [[동로마군|로마군]]의 병력은 7,000명에 불과했다. 당시 징집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도시]] 전체를 뒤졌으나, 무장할 수 있는 인원은 5,000명에 불과했고, 2,000명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 등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 [[제노바 공화국|제노바인]] 용병부대가 훈련과 무장이 가장 훌륭했고, 바다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상인]]들의 함대가 가장 강력했다. 나머지는 소수의 훈련된 병사들과 무장한 시민, 선원, 외국인 자원자, 그리고 [[수도자]]들까지 포함되었다. 방어군에게는 소구경 포탄이 몇 있었으나, 성벽 위에 올려두고 쏘다가 반동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면 큰일이라는 이유로 사용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주변에서 몰려온 난민들을 포함해 5만 명의 시민들이 있었고,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시민들은 벽을 보수하고, 망루에서 경계임무를 맡았다. 식량배급이 시작되었고, 교회에 있는 금이란 금, 은이란 은은 다 뜯어와, 외국인 병사 2,000명에게 줄 급료를 마련했다. 해안 쪽 방면의 4분의 1은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동로마에 [[망명]]해 있던 오스만의 왕족 오르한 첼레비(Orhan Çelebi)에게 맡겨졌다.[* 오스만 왕족에게 방위를 맡긴다고 하면 위험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오스만에서는 왕위에 오르는 자가 자신의 형제들을 몰살하는 관습이 있었다. 즉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 그는 죽은 목숨이기에 콘스탄티노스 황제와 함께 사력을 다해 막으려 했고, 실제로 함락 이후 붙잡혀 목이 날아갔다.] 그가 이끄는 오스만인은 대략 600명으로, 이들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제자리를 지켰다. 해안 방면의 성벽은 금각만이 점령당할 때까지는 안전했으므로 부족한 군사를 아끼기 위해 보초병을 배치한다는 느낌으로 듬성듬성하게 배치되었고, 금각만 방면에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함대가 베네치아인 가브리엘레 트레비사노(Gabriele Trevisano)의 지휘 아래 배치되었다. 4월 5일에 술탄의 군대가 도착하자, 방어자들은 자리를 잡게 된다. 방어벽 전체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외벽에만 병력을 집중시키기로 한다. 콘스탄니노스 11세와 그의 군대는 벽의 중앙부인 메소티히온에 배치된다. 이 벽은 방어벽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으로 여겨졌고, 이곳에 적의 공격이 집중될 터였다. 주스티니아니는 황제의 북쪽 방면인 카리시우스 문(Charisian Gate)에 배치된다. 황제의 남쪽에는 제노바인 카테네오(Cataneo)가 방어를 맡았고, 황금 문(Golden Gate)과 페게 문(Pegae Gate)은 베네치아인 필리포 콘타리니(Filippo Contarini)에게 맡겨졌다.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잘 방어된 도시였다. 제 아무리 오스만군이 많다고 하더라도 전력을 다하지 않는 한 함락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이들을 최대한 막으면서 외부 증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방어군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방어전략이었다. 비정규부대 아잡, [[시파히]]를 비롯한 정규군의 파상공세와 뒤를 이은 예니체리의 공격은 오스만 군의 장기였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그걸 견뎌낼 수 있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다.[* 1453년 당시는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가 오스만에 굴복한 상태였고 [[불가리아 제2제국]]은 40년 전에 멸망한 상태였다.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오스만군은 대포를 사용하는 한편 성벽 아래로 갱도를 판 다음 화약을 폭발시켜 성벽을 파괴하려는 등 상당히 뛰어난 공성 전법을 사용했으며, '요새 공성전을 30년간 진행한 적도 있고' 라는 부분도 있었으나 이는 [[오스만 1세]] 때. 즉 오스만이 막 창건되었을 당시의 일일 뿐만 아니라 처음 공격했을 때부터 최종적으로 함락시킬 때까지를 모두 합한 기간이다. 이렇게 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도 수십년 걸린 셈이 된다. 요컨대 당시 오스만의 '공성전의 역사' 는 충분히 길었으며, 수비측도 ''''외부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면''' 이긴다' 라는 생각이었지 '튀르크족 따위 별것 아니니까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